롱보드

롱보드를 타면서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zip-note 2025. 6. 27. 18:20

운동은 때때로 주변을 더 잘 보게 만든다.
특히 혼자 타는 롱보드는 외부 자극보다 내면의 흐름에 집중하게 해주는데,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그 집중이 주변을 더 섬세하게 관찰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걷기만 하던 길을 바퀴 위에서 달리며 지나갈 때, 보이지 않던 표정, 자세, 분위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보드를 타면서 사람을 더 자주, 더 깊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롱보드를 타며 ‘사람을 관찰하는 시선’이 생긴 과정과, 그 안에서 내가 느낀 작은 변화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건 단지 취미의 변화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순간이었다.

공원에서 보드 타는 사람들

롱보드를 타기 전에는 사람을 피하려고만 했다

입문 초기엔 사람 자체가 부담이었다.
넘어질까 봐 창피했고, 타는 자세가 어설프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시간, 많은 공간은 무조건 피했다.
내가 그들을 피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내 자신을 들키기 싫어서 피해 다녔던 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조금씩 적응해가고, 루틴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을 진짜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내 시선은 더 이상 ‘나를 어떻게 볼까’가 아니라, ‘저 사람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지?’라는 쪽으로 옮겨갔다.

 

롱보드를 타며 관찰하게 된 얼굴들

중랑천 옆 공원에서 보드를 타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마주친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중년 부부, 아기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엄마, 조깅하며 이어폰을 낀 회사원, 점심 이후에 뛰어노는 아이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스쳐 지나갔겠지만, 지금은 그들이 지닌 표정의 색깔이 다르게 느껴진다.
어떤 얼굴은 피곤하고, 어떤 눈은 생각에 잠겨 있고, 어떤 입가는 흐릿한 미소를 띄고 있다.
그걸 지나치며 바라보는 내가 마치 영화 속 카메라처럼 인물들을 스캔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런 관찰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롱보드 위에서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표정을 읽는다

이제는 누가 나를 쳐다보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나는 그들의 시선 뒤에 있는 감정, 그리고 걸음걸이에 담긴 리듬에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걷는 속도와 자세, 대화의 말투에서 그날의 감정 상태가 보일 때도 있다.
놀라운 건, 이런 관찰이 거창한 분석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생긴 감각이라는 거다.
그건 아마도 롱보드를 타며 느끼는 속도와 여백 사이의 틈이, 내 시야에 여유를 만들어준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의 표정은 거울처럼 나를 비추기도 한다

공원에서 가끔 마주치는 늘 무표정한 조깅러 한 명이 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저렇게 무표정하게 보일까?’ 하고 문득 생각한다.
또는 유모차를 밀며 혼잣말을 하던 어떤 엄마의 지친 얼굴을 볼 때면,
‘오늘의 나는 좀 괜찮은 편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표정을 통해 나의 상태를 가늠해보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이건 보드를 타지 않았다면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감정이다.

 

관찰하는 취미가 만들어준 ‘거리감의 미학’

나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로 보드를 탈 만큼 능숙하진 않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느끼고, 해석할 수 있는 감각이 생겼다.
그건 단순히 운동을 넘어서서, 나만의 감정 필터를 하나 갖게 된 기분이다.
사람들 틈에 있되, 휘둘리지 않는 거리.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다 관찰하고 있는 거리.
그 미묘한 간격이 지금의 나를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롱보드를 타며 기술이 늘었다는 말은 아직도 자신 있게 못 하겠다.
하지만 사람을 관찰하고, 감정을 읽는 감각은 확실히 늘었다.
그건 나에게 더 이상 ‘남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느끼는’ 방식의 변화였다.
이 작은 바퀴 위에서 나는 속도를 배우는 동시에, 관계와 감정의 속도도 함께 배우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얼굴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질 것이고, 조금 더 여유로운 시선으로 이 도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